
옥천 청풍정(淸風亭)
옥천 청풍정은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대청호반에 위치한 정자로, 그 이름처럼 ‘맑은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 조선 후기에 참봉 김종경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과거에는 기암절벽과 금강의 굽이치는 물길, 그리고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천하절경으로 유명했습니다.
현재의 청풍정은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된 후 1980년대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던 것을, 1993년 옥천군에서 복원한 것입니다. 비록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옥천 청풍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조선 후기 선비들의 풍류와 시대적 아픔이 교차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본래 충북 옥천의 참봉을 지냈던 김종경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후손인 김종필(金鍾弼)에 의해 중수되었습니다. 이곳은 금강의 맑은 물길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에 자리 잡아, 시와 그림으로 풍류를 즐기던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1800년대 후반에는 명월정(明月亭)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뒤에 설명할 기생 명월과의 사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청풍정은 여러 시대와 인물의 흔적을 간직하며 역사적 의미를 더했습니다.
청풍정에 얽힌 김옥균과 명월의 사연
청풍정이 더욱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조선 말기 개화사상가인 김옥균과 기생 명월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때문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실패한 김옥균은 역적으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곳을 떠돌다 충북 옥천의 청풍정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명월이라는 기생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전해집니다.
명월은 단순한 기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글과 음악에 능하고, 특히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뛰어난 지성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옥천 지역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는데, 명월은 이런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옥균과 명월은 서로의 재능과 아픔을 이해하며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김옥균은 자신을 쫓는 추격대를 피해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고, 명월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명월은 김옥균이 자신 때문에 발목 잡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김옥균의 앞길을 가로막고, 그의 망명에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김옥균이 보는 앞에서 청풍정 아래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 사건은 김옥균에게 깊은 상처와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이후 명월이 떨어진 바위에 ‘명월암’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겨 넣었다고 전해집니다. 명월암은 단순한 바위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개화사상가의 좌절된 꿈과 그 꿈을 지켜주려 했던 한 여인의 순애보가 응축된 비망록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처럼 청풍정과 명월암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절망에 빠진 한 시대의 지식인과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비극적인 사연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장소로, 방문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김옥균(金玉均, 1851~1894)
김옥균은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이자 정치가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1851년(철종 2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안동 김씨 가문이지만,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6세 때 서울 살던 5촌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한양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1872년(고종 9년) 알성문과에서 장원 급제하고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사상을 공부하게 되는데, 특히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개화 운동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개화당을 이끌었는데 서양식 학제 도입, 경찰 제도와 사법권 개혁, 조세 제도 개혁 등을 추진코자 했습니다.
1884년(고종 21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청나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한 이 정변은 ‘혁신정강 14개조’를 통해 문벌 폐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재정 개혁 등을 추진하려 했지만, 청나라의 무력 개입과 일본의 배신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청파 인사들이 살해되는 등 정변은 고종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이후 조선의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일본 정부는 정치적 문제발생을 꺼려 그를 냉대했고, 홋카이도 등지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1894년 청나라의 이홍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합니다.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던 선구적인 인물로 최초의 정치개혁 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합니다만, 정변 과정에서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점, 정적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받습니다. 또한 정변 실패로 인해 이후의 개혁운동이 후퇴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김옥균의 개혁 시도와 열망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재조명되고 1910년에는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역사에서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 곳곳에 있습니다만 김옥균과 갑신정변은 한국사회에 있어서 근대사회 시작의 씨앗이 된 중대사건이라 평가합니다.

<여행 팁>
가실 때는 반드시 네비게이션을 찍고 가셔야 합니다.
매우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외길 따라 한참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동차를 만나면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좁은 길은 아닙니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승용차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주변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김옥균이 숨어지낼 만큼 외딴곳이니 그럴 수 밖에요)
청풍정은 육지지만 대청호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고즈넉한 곳에 있습니다. 들어가는 길에 베스낚시터로 유명한 석호리 선착장이 있고, 청풍정 가는 길 걍변에 석호정이라는 아주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청풍정을 지나 끝까지 들어가시면 작은 마을을 지나 대청호와 만납니다. 청풍정 바로 앞에서도 베스는 잘 잡힙니다. 릴낚시와 대낚시 하시는 분도 가끔 계시지만, 1년에 한두번 오는 물때를 못맞추면 조과는 좋지 않습니다.
한겨울은 너무 쓸쓸하고, 한여름은 너무 더워서 구경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양지바른 곳이라 봄, 가을에 도시락 싸서 돗자리 펴고 한적하게 놀다 오기에는 더 없이 편안한 곳입니다. 주차는 길가에 하셔도 되고, 아주 작은 공터가 있어 너댓대는 댈 수 있습니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시멘트 도로를 따라 청풍정 가는 길은 풍광이 좋아 트래킹 코스로도 제격입니다.